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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소개/탐방

서울 도봉구의 역사문화길..연산군 묘와 은행나무길

[헤럴드경제=황혜진 기자]빌당숲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서울엔 아직도 ‘걷고 싶은 길’이 많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압축적 성장으로 잔존하는 역사가 많지 않다지만 한 발짝 벗어난 서울엔 아직도 역사와 이야기가 흐른다. 도봉산과 북한산 자락 사이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봤다.

‘폭군’하면 단연 떠오르는 왕이 있다. 왕이란 칭호도 붙지 못한 왕,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이 맞닿아 있는 도봉구 오봉 자락 언덕 위가 그의 거처다. ‘연산군묘와 은행나무길’로 그를 찾아가봤다.

걷고 싶은 길 도봉구. [사진=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역사는 폭군이라는데, 그도 많이 아팠겠구나”=지하철 1호선 창동역에서 내려 1144,1161번 버스를 타고 10여분 가면 ‘정의공주묘,연산군묘’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멀리보이는 언덕에 ‘연산군 묘’(방학동 산77)가 있다. 조선시대엔 경기도 양주였으나 현재 서울시 도봉구로 편입된 땅이다.

연산군은 가족 네 명과 함께 잠들어있다. 연산군 옆엔 부인 폐비 신씨가 묻혀있고 그 앞엔 조선시대 3대왕 태종의 마지막 후궁인 ‘의정궁주 조씨’ 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앞쪽엔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뒤 유일하게 남은 연산군 딸인 휘순공주와 그의 남편 구문경이 안장돼있다.

연산군은 1513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강화 교동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꼬인 그의 인생만큼이나 그의 가족사도 드라마틱하다. 중종반종 이후 유일한 핏줄인 딸 휘순공주는 시아버지이자 간신이었던 구수영에 의해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휘순공주는 남편과 재회했지만 쌓인 화가 컸는지 내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끼 낀 연산군의 묘표에서 세월의 흔적이 선명했다. 곳곳이 패이고 금이 간 상석에서 권력의 무상함이 전해진다. 폭군으로 폐위된 연산군. 그래서 그의 무덤은 능이 아닌 묘다. 왕은 둘째치더라도 그의 묘표엔 왕의 아들이라면 으레 있는 용과 여의주 문양도 없다. 그저 덧없는 구름문양만 있을 뿐이다. 사후에도 경계대상이었던 그의 곁엔 문인석만 지키고 있을 뿐 무인석은 보이지 않았다. 팔각이 아닌 사각 장명등 옆 무인석 표정이 슬퍼보였다.

언덕 아래엔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데 되레 언덕 위는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홍기원 도봉문화원 사무국장은 “연산군 묘 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비가 오면 바람이 회오리치고 호곡소리가 나는 ‘비수지풍’”이라며 “오봉의 줄기이기는 하나 그 뒤가 실개천에 의해 끊기고 묘 앞쪽으로 받쳐줄 조대산이나 안산이 없어 허망함을 안겨주는 땅”이라고 설명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목록에서 연산군묘는 광해군묘와 함께 제외됐다.


▶외로운 연산군 수백년간 지켜준 ‘방학동 은행나무’=연산군 묘가 위치한 언덕 바로 밑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다. 자그마니 수령이 540년이나 된다. 약 870년으로 추정됐으나 최근 조사결과 540살로 밝혀졌다. 높이 24m, 직경 9.6m로 성인 남자 4명이 가려질 정도로 크고 웅장하다. 웬만한 나무 몸통만한 나뭇가지를 보고 있자니 이를 나뭇‘가지’라고 불러도 될지 망설여졌다. 나뭇가지 곳곳에는 지지대가 받쳐져있다.

이 나무에는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애처로운 사랑 얘기가 전해진다. 연산군은 실정을 거듭하다 1506년 폐위된 뒤 강화도로 추방됐고 그 해 숨을 거뒀다. 신 씨는 강화도에 마련한 연산군의 묘를 은행나무가 내려다보이는 방학동 언덕으로 옮겨 달라고 중종에게 간청해 1513년 남편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역사는 그를 비난했지만 신씨에게 연산군은 하나뿐인 지아비였다.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지아비에게 나무로나마 따뜻한 가림막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신씨는 이장을 간청했다고 한다. 나무는 연산군 묘 이장 과정과 휘순공주 내외ㆍ 마지막으로 신씨가 연산군 옆자리에 묻히기까지의 전 과정을 함께했다.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는 나무에 불이 난다는 전설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1년 전인 1978년에 화재가 났다. 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이 각별해 주민들은 나무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아파트 단지의 구조를 변경했고 도봉구청은 나무 옆 빌라 두 동(棟) 12가구를 매입한 뒤 철거해 나무를 위한 공간으로 꾸며줬다.

▶절대 마르지 않는 샘, ‘원당샘’= ‘방학동 은행나무’에서 연산군 묘를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 골목으로 30걸음 정도 옮기면 ‘원당댐’이 나온다.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한 우물로 파평윤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 사람들에게 600여년전부터 생활용수를 공급해왔다. 수량도 풍부해 심한 가뭄에도 마른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해 혹한에도 얼어붙은 일이 없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이 댐은 마을 주민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연산군 묘의 제실, ‘양로재’=여기서 다시 20m쯤 가면 오른편으로 ‘연산군묘 제실’이 나온다. 소박한 ‘ㄱ’모양의 제실은 매년 연산군 제의행사 때 사용된다. 연산군 어렸들 때 별명인 양로왕을 따 ‘양로재’(養老齋)라 불리기로 한다.

연산군 종외증손녀의 양자인 이안눌이 지어 1903년까지 연산군 제사를 지냈다. 2010년 개ㆍ보수됐지만 제실 일부가 민간 소유권으로 넘어가 담을 경계로 앙옥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제실을 나와 길을 따라 걸으면 양 옆으로 울긋불긋 물든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막바지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한다. 왼쪽편에 펼쳐진 꽤나 넓은 면적의 주말농장에선 여유로운 시골 풍취가 느껴졌다.


▶연산군에게 집 빼앗긴 이복동생 ‘회산군’ 묘=주말 농장이 끝나는 부근엔 왼편으로 ‘회산군 내외 묘’가 자리잡고 있다. 회산군 이염은 성종의 5남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연산군이 모자란 기녀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궁궐 인근 회산군의 집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조선왕조 실록에 나온다. 기녀들의 거처를 흥청(興淸)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이 유래됐다. 연산군 묘엔 없는 묘표의 용과 여의주 문양이 눈에 띈다. 연꽃을 든 동자석에서 조선초기 불교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지아비 잃은 아낙네, 죽어서도 혼자구나”=회산군 묘를 지나 우이그린빌라 버스정류장 오른쪽 산책로를 한참 걷다보면 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묘 세 개가 차례대로 나온다.

첫번째 묘가 이안눌의 아들, 이합의 두번째 부인인 ‘전주 최씨의 묘’다. 후실이란 이유로 본처와 함께 방학동 천주교회에 묻힌 남편과 300m 떨어져 있다. 볕 하나 안 드는 곳, 곳곳이 무너져내린 봉분이 마냥 서글프다.

더 내려가면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묘가 눈에 띈다. 연산군의 종외증손녀의 묘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남편인 덕수 이씨 이필을 따서 ‘이필의 부인’으로만 알려진다. 이안눌은 그의 양자였지만 양모 옆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시작(詩作)에 능해 4000여수가 넘는 작품도 남겼다.

좀더 내려가면 이안눌의 증손자인 이집의 첫번째 부인 ‘풍산 홍씨의 묘’가 나온다. 앞선 최씨와 달리 정실이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요절해 남편을 두 번째 부인 옆에 양보해야 했다. 이집은 죽기 직전 아들 이주진에게 풍산홍씨 묘 옆에 비문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1등 공신’ 정의공주=다시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처음 발길을 내딛었던 정류장이 나온다. 처음과 달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잘 관리된 묘역이 보인다.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와 부마 양효공 안맹담 내외묘‘다. 

왕이었던 연산군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해 왕족의 고결함과 기품이 느껴졌다. 정의공주는 잘 알져지지 않았지만 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훈민정음이 완성되기 직전, 소리의 변화원리(변음)과 소리를 토하는 원리(토착)를 아무도 규명해내지 못했는데 정의공주가 이를 밝혀낸 것. 그는 아버지 세종이 정사를 펼칠 때 높은 식견과 안목으로 조언을 해 세종으로부터 아들 못지 않는 신임을 받았다.

누이 정의공주를 무척이나 아꼈던 선조는 그의 묘역에 신라 태종무열왕릉비의 두배 크기의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받침대)를 세워 기렸다.

hhj6386@heraldcorp.com